조계산의 하루 — 송광사와 선암사를 거닐며

 조계산의 하루 — 송광사와 선암사를 거닐며

다녀온 날: 2026년 5월 25일(월), 부처님오신날 다음 날

2026년 5월 25일, 부처님오신날 다음 날이었다. 산사에는 아직 연등의 잔향이 남아 있었고, 바람은 서늘했다. 그 서늘함이 오히려 맑았다. 집사람은 동료들과 골프장으로 갔고, 나는 반대편 산길로 향했다. 같은 산, 다른 길이었다.

같은 산, 다른 하루

조계산은 순천의 서쪽과 동쪽을 나란히 품고 있다. 서쪽 기슭에는 송광사, 동쪽 기슭에는 선암사. 한 능선 아래 두 절이 서로 다른 숨으로 앉아 있다. 집사람이 잔디 위를 걷는 동안 나는 이끼 낀 돌계단을 올랐다. 한쪽은 놀이였고, 한쪽은 산책이었다. 잔디는 부드럽고, 이끼는 차갑고 미끄러웠다. 산을 사이에 두고도 하루는 전혀 다른 얼굴로 흘러갔다.



승보의 기상, 송광사

송광사는 과연 승보사찰다웠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수십 채의 전각이 질서 있게 펼쳐져, 산중에 홀연히 들어선 사찰 도시처럼 보였다. 규모가 먼저 눈을 누르지만, 그 당당함 앞에서 옷깃이 저절로 여며졌다. 열여섯 국사를 낸 절의 무게가 지붕과 마당 사이사이에 앉아 있는 듯했다.

불일암으로 오르는 길은 더 고요했다. 대숲이 길을 덮고, 편백과 삼나무가 그늘을 깊게 만들었다. 풍경이 바람에 흔들리고 새소리가 그 사이를 지났다. 법정 스님이 오래 머물던 암자라 그런지, 발소리가 커지면 미안해졌다. 큰 가람의 위엄과 작은 암자의 고요가 한 산자락에서 나란히 숨 쉬고 있었다. 송광사는 산을 품어 도시를 만든 절이다.


승선교를 건너면, 선암사

선암사는 분위기가 달랐다. 승선교를 건너는 순간 풍경이 낮아졌다. 무지개처럼 휜 돌다리가 계곡을 잇고, 그 너머로 강선루가 조용히 앉아 있었다. 다리를 건너면 속세에서 한 발 물러난 듯했다. 전각들은 크지 않았다. 산의 굴곡을 거스르지 않고, 낮은 지붕이 숲과 나란히 누워 있었다. 잘 다듬어진 양반가 고택에 든 듯 포근했다.

웅장함 대신 정갈함이 있고, 위엄 대신 온기가 있었다. 송광사가 질서로 산을 세운다면, 선암사는 산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한쪽은 옷깃을 여미게 하고, 한쪽은 어깨를 내려놓게 한다. 닮지 않은 두 절이 같은 능선 아래서 서로를 비추고 있었다.

두 얼굴을 가진 산

해 질 무렵, 연등이 다시 희미해졌다. 산은 원래의 숨으로 돌아갔다. 나는 돌계단의 이끼를 한 번 더 밟고 내려왔다. 조계산은 두 얼굴을 가진 산이다. 서쪽은 크고, 동쪽은 낮다. 한쪽은 승보의 기상으로 서 있고, 한쪽은 선암의 고요로 앉아 있다.

두 얼굴이 닮지 않았기에 산은 더 깊게 느껴진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같은 산 아래서 서로 다른 하루를 허락한다. 그날 집사람은 잔디 위에서, 나는 이끼 위에서 하루를 보냈다. 넉 달이 지난 지금 돌아보아도 그 차이가 이상하게 선명하다. 같은 산에 두 길이 있었고, 그 두 길이 하루를 나누어 가졌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대통령의 반려는 문서로 존재하는가

‘취지’로 듣고 싶겠지만, ‘문언’으로 말하는 사람.

헌법으로 본 대법관 임명제도의 변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