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의로 산 법학자, 그리고 燕賊簒位

 절의로 산 법학자, 그리고 燕賊簒位

— 붓을 꺾지 않은 자들의 이야기

호즈미 노부시게(穗積陳重)는 『법창야화(法窓夜話)』에서 이렇게 썼다.

“진정한 선비의 본령은 절의(節義)다. 특히 학자는 진리를 밝히고 인재를 기르며 세상을 이끄는 큰 임무를 지닌 만큼, 학문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 없이는 그 이름을 감당할 수 없다.”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역사는 그 말을 몸으로 증명한 사람들을 가끔, 아주 가끔 기억한다.




1. 황제의 명령과 법학자의 칼

서기 211년 겨울, 로마 황궁의 밤은 피비린내로 가득했다.

카라칼라 황제가 친동생 게타를 죽였다. 화해를 하자며 어머니의 처소로 불러낸 뒤, 미리 숨겨둔 병사들을 시켜 찌르게 한 것이다. 게타는 어머니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고, 어머니의 옷은 아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제국의 공동 황제가 그렇게 사라졌다. 그러나 황제에게는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살인보다 더 까다로운 일, 곧 정당화였다.

황제는 법학자 파피니아누스(Aemilius Papinianus)를 불렀다. 당대 로마 최고의 법학자이자 선황 세베루스 시절 근위대장을 지낸 제국 법질서의 산 증인이었다. 황제는 명령했다. “게타의 죽음을 원로원과 백성 앞에 정당화하는 글을 지어라.”

침묵이 흘렀다. 황궁의 모든 신하가 숨을 죽였다. 거절이란 선택지가 없는 자리였다. 황제의 명은 곧 법이었고, 법 위에는 칼이 있었다. 평생을 법과 함께 살아온 파피니아누스가 그 칼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친족 살해는 저지르기보다 변호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황제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파피니아누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죄 없이 죽은 이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은, 또 한 번의 친족 살해입니다.”

그는 결국 처형되었다. 병사들이 도끼로 그의 목을 쳤다. 그의 붓은 끝내 황제의 거짓말을 쓰지 않았다.

후세 황제들은 그의 학문을 법률로 만들었다. 426년 테오도시우스 2세와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인용법」은 다섯 대법률가의 학설에 법적 효력을 부여하면서, 학설이 동수로 갈릴 때에는 반드시 파피니아누스의 견해를 따르도록 못 박았다. 죽은 뒤에도 그는 로마 법학의 최종 결정자였다.

그러나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이렇게 썼다.

“이러한 용감한 덕행은 파피니아누스의 기억에 더 큰 영광을 가져다주었으니, 그의 모든 중요한 직무와 많은 저작, 그리고 로마 법률의 모든 시대를 통해 보존해 온 뛰어난 명성보다도 더 큰 영광이었다.”

학문은 그를 위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절의가 그를 불멸로 만들었다.

2. 글 한 줄과 바꾼 목숨

1402년 여름, 남경(南京).

연왕(燕王) 주체(朱棣)는 '정난의 변'으로 마침내 조카 건문제를 몰아내고 황위를 손에 쥐었다. 피로 쓴 승리였다. 4년의 내전, 수만의 주검. 이제 남은 일은 그것을 ‘찬탈’이 아닌 ‘정통’으로 포장하는 것이었다.

새 황제 영락제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방효유(方孝孺). 건문제의 스승이자 천하의 대학자. 그의 붓으로 쓴 즉위 조서라면 천하가 고개를 숙일 것이었다. 참모 요광효는 출병 전에 이미 당부해 두었다. “방효유만큼은 죽이지 마십시오. 그를 죽이면 천하에 글 읽는 씨가 마릅니다.”

살려주마. 다만 붓 한 번만 빌리자.

방효유가 끌려왔다. 상복 차림에 통곡하며 들어선 그의 눈빛은 이미 죽음을 각오한 자의 것이었다. 영락제는 노기를 누르고 타일렀다. “그대의 이름은 천하가 안다. 새 조정을 도우라. 조서는 그대가 아니면 안 된다.”

방효유는 붓을 받아 땅에 내던졌다.

“죽으면 죽을 뿐, 조서는 쓸 수 없다.”

격노한 영락제가 소리쳤다. “구족(九族)이 멸해져도 좋단 말이냐!”

방효유가 답했다. “십족(十族)을 멸한들 나를 어찌하겠는가.”

그리고 그는 다시 붓을 들어 네 글자를 썼다.

燕賊簒位(연적찬위)

— 연나라 도적이 황위를 찬탈하였다.

방효유는 처형되었다. 전해지기로는 친족에 제자와 벗까지 더한 ‘십족’이 화를 입어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한 줄의 글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한 줄은 육백 년이 넘도록 살아남았다. 역사는 그 붓이 옳았다고 기록했다.




3. 붓은 칼보다 강하다 — 그러나

파피니아누스와 방효유. 두 사람은 시대도 다르고 문명도 달랐다. 한 사람은 로마의 토가를 입었고, 한 사람은 명나라의 먹물 머금은 붓을 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마주한 장면은 놀랍도록 닮았다.

권력자가 붓을 내밀었다. 이 한 장만 써주면 목숨을 건져주마.

그리고 두 사람은 같은 선택을 했다.

사람들은 묻는다. 어리석은 것 아닌가? 조금만 타협하면 살 수 있었는데. 살아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는데. 고개 한 번 숙이는 것이 그리 대단한 일인가?

그러나 법률가에게 붓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법문서는 현실을 만든다. 파피니아누스가 그 글을 썼다면 게타의 죽음은 공식적으로 정당한 처형이 되었을 것이다. 방효유가 조서를 썼다면 찬탈은 공식적으로 정통이 되었을 것이다. 붓질 하나가 역사를 바꿀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거절했다. 그것은 고집이 아니었다. 법이란 무엇인가, 글이란 무엇인가, 학자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최후의 답이었다.

호즈미 노부시게의 말이 다시 울린다. “학문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 없이는 그 이름을 감당할 수 없다.”

맺으며 — 우리에게는

사법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법질서가 무너지고, 권력에 부화뇌동하는 법해석이 난무하는 현실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황제가 붓을 내밀 때, 우리 시대의 법률가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수험서를 외워 시험을 통과한 법률가는 오늘도 넘쳐난다. 그러나 높은 학식에 굳은 절개까지 갖춘 사람은 결코 쉽게 얻을 수 없다. 어쩌면 아예 만들어지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절의는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파피니아누스는 로마 법학의 정점에 섰지만, 그를 역사에 새긴 것은 저술이 아니라 마지막 한마디였다.

방효유는 유학의 정수를 꿰뚫었지만, 천하에 그의 이름을 새긴 것은 문집이 아니라 마지막 네 글자였다.

燕賊簒位.

붓은 칼보다 강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강한 것이 있다.

붓을 꺾지 않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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