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는 개 - 고도를 기다리며 -
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는 개 — 하치코 이야기
세상에는 충견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개 한 마리가 영화의 주인공이 되고, 살아 있는 동안에 동상까지 세워진 경우는 하치코가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시부야역의 하치코
하치코는 1923년 아키타현에서 태어난 아키타견이다. 도쿄제국대학 농학부의 우에노 히데사부로 교수가 데려다 키웠는데, 하치코는 매일 아침 주인을 시부야역까지 배웅하고 저녁이면 다시 역 앞에 나가 주인을 맞았다. 그런데 1925년 5월, 우에노 교수가 강의 중에 갑자기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하치코는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그날부터 하치코는 저녁마다 시부야역 앞으로 나가 주인을 기다렸다. 하루도 아니고, 한 해도 아니고, 1935년 3월 자신이 죽을 때까지 십 년 가까이 기다렸다.
1932년 아사히신문이 이 이야기를 보도하면서 하치코는 전국적으로 유명해졌고, 1934년 4월에는 시부야역 앞에 동상이 세워졌다. 동상 제막식에 하치코가 직접 참석했다니, 자기 동상을 바라본 유일한 개였을 것이다. 그 동상은 전쟁 중 공출되어 녹여졌다가 1948년에 다시 세워져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금 시부야역의 그 출구는 아예 '하치코 출구'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세계에서 가장 붐빈다는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 앞, 하치코 동상은 도쿄 사람들의 대표적인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하치코 앞에서 보자"는 말 한마디면 약속이 성립한다. 주인을 기다리던 개가 이제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의 곁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하치코 동상 앞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이라면, 상대가 조금 늦게 와도 얼마든지 용서가 될 것만 같다. 십 년을 기다린 개 옆에서 한 시간을 기다린다 한들 못 참겠는가.
영화 「하치 이야기」
이 이야기는 1987년 일본에서 먼저 영화로 만들어졌고, 2009년 리처드 기어 주연의 「하치 이야기(Hachi: A Dog's Tale)」로 다시 태어나 세계에 알려졌다. 배경을 미국의 작은 기차역 마을로 옮겼을 뿐 줄거리는 원래 이야기 그대로다. 우리나라에는 2012년에야 개봉되었는데, 나는 그때는 보지 못했고 최근에 유튜브에서 자막 없는 영어판으로 보았다. 대사를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내용은 눈물이 날 만큼 그대로 와닿았다. 말을 몰라도 통하는 이야기, 그것이 이 영화의 힘이다.
영화는 어찌 보면 밋밋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스토리가 단순하다. 교수가 개를 데려오고, 개는 역까지 배웅과 마중을 하고, 교수가 죽고, 개는 기다린다. 반전도 없고 악역도 없다. 그런데도 눈물이 난다. 눈이 내리는 역 앞 화단에 쪼그리고 앉아 역의 출구를 바라보는 하치코의 모습, 세월이 흘러 털이 거칠어지고 걸음이 느려졌는데도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그 모습은 그 어떤 화려한 대사보다도 강하게 심금을 울린다.
리처드 기어의 연기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배역에 딱 맞는다. 그는 개에게 말을 거는 장면에서 조금도 과장하지 않는다. 그저 좋아하고, 그저 아낀다. 그 담담함이 있었기에 뒤에 남겨진 개의 기다림이 더 아프게 다가온다. 영화의 힘은 결국 이야기의 단순함과 배우의 절제에서 나온다.
아르고스와 파트라슈
충견 이야기는 일본만의 것이 아니다. 문학 속 가장 오래된 충견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아르고스일 것이다. 트로이 전쟁과 긴 방랑 끝에 스무 해 만에 거지 차림으로 고향에 돌아온 오디세우스를, 아내도 아들도 알아보지 못했는데 거름더미 위에 늙어 누워 있던 개 아르고스만이 알아보았다. 아르고스는 귀를 늘어뜨리고 꼬리를 흔들 뿐 일어설 힘이 없었고, 주인을 확인한 그 순간 숨을 거둔다. 삼천 년 전의 시인이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개의 기다림이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흔드는지를.
「플란더스의 개」를 보면 문학과 영화의 위력을 실감하게 된다. 벨기에를 무대로 하지만 원작은 영국 작가 위다가 1872년에 쓴 픽션이다. 정작 이 이야기를 세계에 퍼뜨린 것은 1975년 일본에서 만든 만화영화였다. 네로와 파트라슈가 성당의 그림 아래에서 얼어 죽는 마지막 장면에 일본 열도가 울었다. 반면 벨기에는 이 이야기를 오래 모른 척했다. 가난한 소년과 개를 외면하고 끝내 죽게 만든 냉혹한 마을로 그려졌으니 달가울 리 없었다. 그런데 일본 관광객들이 네로와 파트라슈의 자취를 찾아 안트베르펜으로 자꾸 몰려오자, 벨기에는 결국 소년과 개의 동상을 세웠고 지금은 안트베르펜 대성당 앞에 두 주인공이 잠든 기념물까지 있다. 자기 나라 이야기도 아니고, 자기 나라를 좋게 그린 이야기도 아닌데, 잘 만든 작품 하나가 한 도시의 풍경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우리에게도 의로운 개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 이야기는 어떤가. 경북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에는 '의구총(義狗塚)'이 있다. 술에 취해 들판에 잠든 주인 곁으로 불이 번지자 개가 냇물에 몸을 적셔 와 주인 주위의 풀을 적시기를 거듭하여 불을 막고 주인을 살린 뒤, 기진하여 제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다. 사람들이 그 개를 묻어주고 비를 세웠다. 전북 임실의 '오수 의견(獒樹義犬)'도 같은 줄기의 이야기이고, 오수라는 지명 자체가 그 개에게서 나왔다. 300여 킬로미터를 걸어 옛 주인을 찾아온 진돗개 백구 이야기는 1990년대에 온 나라를 울렸다.
불 속에서 주인을 살린 구미의 의구, 지명이 되어 남은 오수의 의견, 수백 리를 걸어 돌아온 진돗개 백구. 하나하나가 「플란더스의 개」나 「하치 이야기」에 견주어도 모자랄 것이 없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비석과 향토사 속에 두었고, 일본은 영화와 동상과 만남의 장소로 키워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구미의 의구, 오수의 의견, 진돗개 백구가 영화나 소설, 동화로 태어나 세계인의 마음을 두드리는 날이 오면 좋겠다. 이야기는 이미 충분하다. 발굴하고 다듬는 손길이 필요할 뿐이다.
고도를 기다리며
시부야의 하치코 동상 앞,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떠오르게 한다. 어쩌면 하치는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주인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럼에도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았던 것은 주인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기다림 자체를 놓지 않으려 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가 기다린 것은 돌아오지 않을 한 사람이 아니라, 오지 않아도 버릴 수 없는 그 무엇이었는지 모른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끝내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렸듯이. 그 고도가 절대자인지, 희망인지, 자유인지는 각자의 해석에 맡겨져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 저마다의 시부야역 앞에서 저마다의 고도를 기다리며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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