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장의 침묵은 말보다 무겁다

 대법원장의 침묵은 말보다 무겁다

— 말이 아니라 권한쟁의심판으로 답하라 —

오늘 9월 11일, 대법원 중앙홀에서 제12회 대한민국 법원의 날 기념식이 열렸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기념사에서 “헌법상 독립된 국가기관인 법원이 다른 국가기관이나 정치권력, 사회 세력은 물론 소송 당사자로부터도 부당한 간섭이나 영향을 받지 않고 오직 헌법과 법률에 따라 중립적이고 공정하게 재판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대법관 재제청 문제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대통령실은 기다렸다는 듯 대변인 성명을 통해 재제청 후속 절차를 거듭 압박하고 나섰다.



경과를 돌아보자. 대법원장의 대법관임명 제청, 청와대의 초유의 반려와 재제청 요구, 국회 법사위의 대법원장 출석 요구, 그리고 대법원장의 갑작스러운 부친상. 상을 치르고 업무에 복귀한 대법원장에게 정치권과 대통령실은 연일 답을 내놓으라고 다그치고 있다. 침묵하면 침묵한다고 압박하고, 입장을 내면 그 입장을 물고 늘어질 태세다.

나는 이 국면에서 대법원장이 취해야 할 행보는 분명하다고 본다. 재제청 문제에 대하여 아무런 언급 없이 지나가는 것, 그리고 말 대신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하는 것이다.

먼저 침묵에 대하여. 대법원장의 침묵은 회피가 아니라 그 자체로 헌법적 태도다. 헌법 제104조 제2항에 따른 제청은 이미 적법하게 완료되었다. 제청권자가 권한을 행사하였으면 그것으로 대법원장의 절차는 끝난 것이고, 이제 공은 임명동의안을 제출할 대통령과 동의 여부를 결정할 국회에 넘어가 있다. 더 보탤 말이 없는 사람이 말을 보태는 순간, 대법원장은 헌법기관의 수장에서 정치적 공방의 당사자로 끌려 내려간다. 국회 출석 요구에 대하여 삼권분립과 사법부 독립을 이유로 응하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 옳았다. 제청권 행사의 이유를 다른 권력 앞에서 해명하기 시작하면, 제청권의 독립성은 그 해명과 함께 무너진다.

그러나 침묵만으로는 부족하다. 침묵이 방치로 읽히지 않으려면, 말이 아닌 절차로 답하여야 한다. 그 절차가 바로 권한쟁의심판이다. 헌법재판소법은 국가기관 상호간의 권한 다툼을 헌법재판소가 심판하도록 정하고 있고, 법원은 그 당사자가 될 수 있다. 대통령의 반려와 재제청 요구, 그리고 임명동의안 제출의 부작위가 대법원장의 헌법상 제청권을 침해하는지에 대하여 유권적 판단을 구하는 것이다. 이는 싸움을 거는 것이 아니라, 기관 간 분쟁의 해결을 위해 헌법이 마련해 둔 유일한 정도(正道)를 걷는 것이다. 심판이 계속되는 동안 재추천에 응하지 않을 법적 명분도 자연히 확보된다.

그리고 버텨야 한다. 재추천 절차에 착수하는 순간 대법원장은 추천권이 자신의 고유권한임을 스스로 부인하는 것이 되고, 대통령의 반려권이라는 헌법에 없는 권한을 선례로 만들어 주게 된다. 한 번 만들어진 선례는 앞으로의 모든 대법관 인선에서 되풀이될 것이다. 내년 임기 만료로 퇴임하는 그날까지 헌법이 부여한 직무를 묵묵히 수행하면서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기다리는 것, 그것이 고집이 아니라 제청권의 수호이고, 한 사람의 거취 문제가 아니라 사법부 독립이라는 헌법 가치의 문제다.

오늘 기념사에서 대법원장은 “사법권의 독립은 갖가지 압력과 간섭 속에서 끊임없이 시험받아 왔다”고 말했다. 지금이 바로 그 시험대다. 역대 어느 대법원장도 겪지 않은 압박 앞에서, 말을 아끼고 절차로 답하며 임기를 지켜내는 것. 훗날 헌정사는 요란한 성명이 아니라 그 무거운 침묵을 기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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