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할 차례는 대법원장이 아니라 대통령이다
답할 차례는 대법원장이 아니라 대통령이다
— 대법원장은 침묵으로 원칙을 지키고, 대통령은 서면으로 거부하고 마주 앉아 풀어라
조희대 대법원장이 제청한 손봉기 대법관 후보자에 대해 청와대가 재제청을 요청했다. 그 뒤 청와대는 새 추천위원회를 꾸리지 말고 기존 추천위가 올린 후보 가운데서 다시 제청하라는 요구까지 내놓았다. 대법원장은 이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하여야 하는가. 무조건 거부도, 무조건 수용도 위험하다. 선택지는 세 가지다.
첫째, 추천위원회가 이미 추천한 다른 후보를 재제청하는 것이다. 가장 빠르다. 그러나 특정 인사를 지목받아 제청하는 모양이 되어, 제청권이 임명권에 종속되었다는 선례를 남긴다. 사법부 독립에 대한 중대한 침해다.
둘째, 추천위원회를 새로 구성해 원점에서 절차를 다시 밟는 것이다. 법원조직법은 제청할 때마다 추천위를 구성하도록 하고 있으니 법적 명분이 있다. 사법부 독립의 형식을 지키면서 절차적 정당성을 회복하고 공백을 해소하는 절충안이다.
셋째, 손 후보자 제청을 고수하면서 무대응하거나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하는 것이다. 원칙에는 가장 충실하지만 대법관 공석의 장기화로 이어진다.
대법원장은 이미 침묵으로 답했다
나는 대법원장이 이미 침묵으로 답했다고 본다. 그리고 그 침묵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헌법 제82조는 대통령의 국법상 행위는 문서로 하고 국무총리와 관계 국무위원이 부서(副署)하도록 정하고 있다. 대법관 제청에 대한 반려나 재제청 요구는 헌법기관 사이의 국법상 행위다. 그런데 지금까지 청와대의 요구는 대변인 브리핑, 즉 말로만 나왔고, 부서를 갖춘 문서가 대법원에 전달됐다는 보도는 어디에도 없다. 문서 없는 반려는 법적 효력이 없는 정치행위에 불과하고, 법적으로 손 후보자 제청은 여전히 살아 있는 상태다.
청와대는 대법원장이 사전 협의 없이 서면으로 제청했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청와대는 대변인의 말로만 답하고, 정식 반려나 임명 거부 행위를 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답을 낼 차례는 대법원장이 아니라 대통령이다.
대법원장은 정치인이 아니다, 그러나 대통령은 정치인이다
여기서 두 헌법기관의 성격 차이를 분명히 해야 한다. 대법원장은 사법부 독립을 지켜야 할 법원의 수장이지 정치인이 아니다. 대법원장이 브리핑에 브리핑으로 맞서고 여론에 호소하는 순간 사법부는 정치판에 휩쓸리게 된다. 여당은 '정치하는 대법원장'이라 부를 것이고, 야당은 '우리 편'으로 끌어안으려 들 것이다.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 사법부의 힘은 목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절차를 지키는 데 있다. 그러므로 대법원장이 원칙을 지켜 무응답하는 것은 회피가 아니라, 법적 효력 없는 요구에 대한 정당한 무응답이다.
반면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정치인이다. 국민이 선출한 정치권력이고, 갈등을 조정하고 매듭짓는 것이 그 직분이다. 대법관 공백의 장기화를 막아야 할 책임은 헌법상 제청을 방치한 쪽, 그리고 정치적 해결 능력을 가진 쪽에 있다. 이 문제는 사법부가 법적으로 버티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어떻게 푸느냐의 문제다.
대통령이 풀어야 할 순서
해법은 복잡하지 않다. 순서만 지키면 된다.
먼저, 대통령이 정식으로 거부 의사를 밝혀야 한다. 대변인의 입이 아니라 국무총리와 관계 국무위원의 부서를 갖춘 서면으로, 임명 거부 의사를 표시하거나 대법원장의 제청서를 정식으로 반려하는 것이다. 헌법 제82조가 명하는 방식이고, 그래야 비로소 대법원장이 응답할 수 있는 국법상 행위가 존재하게 된다. 서면으로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자신의 결정이 헌법에 맞는다고 확신한다면 부서한 문서 한 장을 두려워할 까닭이 없다.
다음으로, 서면 거부가 있으면 대법원장은 법원조직법에 따라 추천위원회를 새로 구성해 후보군을 다시 정하면 된다. 기존 추천위의 명단을 재활용하라는 요구에 응할 필요는 없다. 추천을 마친 위원회는 해산된 것으로 보는 것이 법이고, 새 추천위를 구성하는 것이 제청권을 지키면서 절차를 다시 여는 유일한 길이다.
마지막으로, 후보군이 정해지면 대통령이 대법원장을 직접 만나야 한다. 대변인을 내세워 압박할 것이 아니라 임명권자가 제청권자와 마주 앉아, 적임자가 제청되도록 상호 협의하는 것이다. 그것이 헌법이 제청권과 임명권을 나누어 놓은 이유이고, 사전 협의라는 관례가 있어 온 이유다. 제청권과 임명권은 서로를 견제하라고 나눈 것이지, 서로를 무시하라고 나눈 것이 아니다.
국민이 비용을 치르고 있다
지금 대법관 두 자리가 비어 있고, 상고심 사건은 계속 쌓이고 있다. 이 갈등의 비용을 치르는 것은 청와대도 대법원도 아닌 국민이다. 어느 쪽이 이기느냐보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끝내느냐가 국민에게는 중요하다.
대법원장은 원칙을 지키며 침묵하면 된다. 그 침묵은 이미 충분한 답이다. 매듭을 지어야 할 사람은 대통령이다. 서면으로 거부하고, 새 추천위의 결과를 기다리고, 대법원장과 마주 앉으라. 답할 차례는 대법원장이 아니라 대통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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