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은 법리가 아니다 — 대법원장의 대법관 임명제청권은 실체적 권한이다
신념은 법리가 아니다 — 대법원장의 대법관 임명제청권은 실체적 권한이다
대법원장의 대법관 임명제청권은 대통령의 임명권을 보조하는 절차가 아니다. 헌법이 사법부 구성을 위하여 대법원장에게 따로 맡긴 실체적 권한이다.
요즘 대법관 임명을 둘러싸고 정치권과 일부 토론회에서 정반대의 주장이 나온다. 제청은 선출된 대통령의 임명권이 올바르게 행사되도록 뒷받침하는 절차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법리의 옷을 입고 있지만, 그 속은 신념이다.
법리와 신념은 다르다. 신념은 ‘이렇게 되어야 한다’에서 출발하고, 법리는 ‘헌법이 이렇게 정하였다’에서 출발한다. 신념을 법리처럼 말하기 시작하면 법리 논쟁은 의미를 잃는다. 결론이 먼저 정해져 있고 조문은 장식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문제는 법리로 따져야 한다.
조문은 제청을 임명의 요건으로 두었다
헌법 제104조는 법원 구성을 세 갈래로 나눈다. 대법원장은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그 밖의 법관은 대법관회의의 동의를 얻어 대법원장이 임명한다.
같은 조 안에서 헌법은 제청을 넣은 자리와 뺀 자리를 구별하였다. 대법원장 임명에는 사법부의 제청이 없고, 일반 법관 임명에는 대통령이 없다. 대법관 임명에만 제청, 동의, 임명이 겹친다. 대통령에게 더 넓은 재량을 주려 하였다면 제1항처럼 쓰면 되었다. 그렇게 쓰지 않은 것은 실수가 아니라 권한의 배분이다.
‘제청으로’는 임명보다 시간상 앞선 단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임명이 성립하기 위한 구성요건이다. 헌법 조항의 각 요건은 저마다 규범력을 가진다. 국회의 동의도 임명보다 앞서지만, 누구도 그것을 대통령 임명권의 보조 절차라고 부르지 않는다. 조약 체결에 대한 동의, 국무총리 임명 동의도 마찬가지다. 유독 대법원장의 제청만 보조 절차로 읽는 것은 해석이 아니라 선별이다.
같은 ‘제청’이라도 놓인 자리가 다르다
보조절차론은 국무위원 임명을 끌어온다. 헌법 제87조 제1항은 국무위원을 국무총리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정한다. 그러나 단어가 같다고 법적 성질까지 같지는 않다.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고 그 명을 받아 행정각부를 통할한다. 그의 제청은 같은 행정부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선 협의다. 대법원장의 제청은 정반대 자리에 있다. 대법관은 대통령과 행정부의 행위를 심판하는 법원의 구성원이다. 자기를 보좌할 각료를 고르는 일과 자기를 견제할 재판기관을 구성하는 일을 같은 성질로 묶는 것은 권력분립을 지운 읽기다.
헌법 제111조 제3항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헌법재판소 재판관 9인 중 3인은 국회가 선출하고 3인은 대법원장이 지명한다. 물론 지명과 제청은 같지 않다. 지명은 그것만으로 대통령을 구속하고, 제청은 국회의 동의와 대통령의 임명을 함께 거친다. 그러나 그 차이는 구속력의 정도에 있을 뿐이다. 헌법은 최고 재판기관을 구성할 때 누구를 후보로 올릴지 정하는 몫을 사법부 수장에게 일관되게 맡겼다. 제청만 그 몫에서 떼어 사무 보조로 읽을 근거는 조문 어디에도 없다. 헌법 제101조와 제103조가 사법권과 법관의 독립을 선언한 체계와도 맞지 않는다.
민주적 정당성은 권한의 우열을 정하지 않는다
보조절차론의 실제 동력은 조문이 아니라 민주적 정당성이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의 임명권이 선출되지 않은 대법원장의 제청에 묶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가 신념이 법리의 자리를 차지하는 지점이다.
이 논증은 ‘누가 뽑았는가’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뒤섞는다. 국민이 뽑았다는 사실은 대통령이 권한을 갖는 근거이지, 그 권한이 어디까지 미치는지를 정하는 기준이 아니다. 권한의 범위는 헌법 조문이 정한다. 헌법이 권력을 나눈 까닭도 선출된 권력에 한계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법원장 역시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한 사람이므로 국민의 뜻과 무관한 자리가 아니다. 국민이 뽑았다는 이유만으로, 헌법이 다른 기관에 준 권한을 없는 것처럼 다룰 수는 없다.
선출 여부를 권한의 우열을 가르는 잣대로 삼으면 사법권의 독립은 선출 권력이 허용하는 범위 안의 독립이 된다. 그것은 헌법 제103조가 말하는 독립이 아니다. 선출 권력이 우위에 서야 한다는 생각은 하나의 정치적 신념으로 존중받을 수 있다. 그러나 현행 헌법이 그렇게 정하였다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법리가 아니라 법리의 외양을 빌린 주장이 된다.
거부할 수 있다는 것과 지시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르다
제청이 실체적 권한이라고 해서 대통령의 임명권이 형식적 추인에 그친다는 뜻은 아니다. 임명권도 헌법이 준 권한이다. 제청된 사람의 임명을 대통령이 거부할 수 있는지는 학설이 갈리고, 그 다툼은 열어 두어도 된다.
다만 거부가 가능하다고 보더라도 거기서 나오는 것은 제청된 그 사람을 임명하지 않을 권한뿐이다. 다른 사람을 제청하라고 요구할 권한은 나오지 않는다. ‘아니오’라고 말할 권한을 ‘누구를 올리라’는 권한으로 넓히면 제청은 자문이 된다. 헌법이 자문이라 쓰지 않은 것을 자문으로 만드는 일은 해석의 한계를 넘는다.
사전 협의 관행도 결론을 바꾸지 못한다. 대통령과 대법원장이 제청 전에 의견을 나누어 온 것은 헌법기관 사이의 예양이다. 관행은 헌법 개정 절차를 대신하지 못한다. 헌법도 법률도 대통령에게 재제청 요구권을 두지 않았고, 법원조직법의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는 대법원장의 제청을 돕는 사법부 안의 장치다. 협의가 어긋나 공백이 생긴다면 그것은 견제 장치가 작동한 결과이지, 권한의 내용을 바꿀 이유가 아니다.
반론에 답한다
귀 기울일 반론이 둘 있다. 첫째는 제청과 임명이 모두 실질적 권한이므로 두 기관의 협의가 헌법상 요청이라는 주장이다. 절반은 옳다. 두 권한이 모두 실질적이라면 서로 존중하고 협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이 주장은 보조절차론의 근거가 아니라 그 반박이다. 협의는 대등한 권한 사이에서만 성립하고, 보조 절차와는 협의할 일이 없다. 협의가 바람직하다고 해서, 협의가 깨지면 임명권자의 뜻이 앞선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둘째는 제청권이 대법원장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비판이다. 대법원장이 대법관 구성을 사실상 좌우하면 사법부가 수장 중심으로 굳어지고, 대법원의 다양성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 비판은 무겁고, 나도 가볍게 넘길 생각이 없다.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의 구성과 심사 과정을 더 투명하게 하자는 논의는 그래서 필요하다.
그러나 권한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그 권한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의 문제다. 그 권한이 지금 실체적 권한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집중이 걱정이라면 답은 제청 과정을 다듬거나 헌법을 고쳐 구성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대법원장에게서 덜어 낸 몫을 해석으로 대통령에게 옮기는 것은 집중을 푸는 일이 아니라 집중의 자리를 바꾸는 일이다. 실제로 대법관 임명 방식은 헌법이 바뀔 때마다 함께 바뀌어 왔다. 그 변천사는 앞선 글에 정리해 두었다.
법리는 법리로 따져야 한다
‘제청은 임명권이 올바르게 행사되도록 뒷받침하는 권한’이라는 문장은 법리처럼 들리지만 법리가 아니다. 어떤 권한을 상대 권한에 봉사하는 기능으로 정의하면 그 권한은 이미 비어 있다. 헌법이 대법관 임명을 제청, 동의, 임명의 삼면 구조로 둔 것은 어느 한 기관의 뜻만으로 최고 법원이 채워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1987년 헌법이 여기에 국회의 동의를 더한 취지도 같다.
대법원장의 제청권이 지나치다고 믿는다면 길은 열려 있다. 헌법을 고쳐 다른 구성 방식을 제안하면 된다. 신념은 개헌의 동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조문을 그대로 둔 채 제청을 보조 절차라고 부르는 것은 해석이 아니라 위장이다.
신념이나 이념에 매몰되면 법리 논쟁은 무의미해진다. 서로 다른 신념은 조문 앞에서만 같은 언어로 다툴 수 있기 때문이다. 법리는 권한을 행사하려는 쪽의 신념에서가 아니라, 헌법이 그 권한을 어느 기관에 어떤 요건으로 두었는지에서 출발한다. 헌법 제104조 제2항의 제청은 그 출발점에서 이미 실체적 권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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